언어는 ‘말하기’만이 아니라 듣기·이해·제스처·공동주의(같은 것에 함께 주의 두기)·놀이 상상력까지 포괄하는 넓은 능력이다. 따라서 “말이 늦다”는 인상 뒤에는 전혀 다른 원인과 경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이 글은 보호자가 헷갈리기 쉬운 ‘정상 변이’와 ‘지연’의 경계를 월령별 기준으로 정리하고, 빨리 알아차려야 할 레드 플래그(예: 16개월에 의미 있는 단어 없음, 24개월에 두 단어 연결 없음, 이름을 불러도 반응 없음, 손가락 가리키기 결여, 언어 퇴행 등)를 구체적으로 짚는다. 이어서 가정에서 바로 쓸 수 있는 4주 코칭 로드맵(반응적 상호작용·모델링·확장·공동주의 놀이·그림책 대화법·화면 노출 관리)을 제시하고, 병원·치료로 이어지는 실제 경로(청력 평가→발달 선별→언어평가→개별 중재 계획)와 기관 이용 팁을 정리했다. 핵심은 “기다리다 보면 늦게라도 다 한다”가 아니라, ‘의심되면 선별→환경을 바꾸고→필요 시 중재를 붙인다’는 순서다. 이 순서를 빠르게 밟을수록 아이는 ‘말’뿐 아니라 사회성·정서·놀이까지 함께 자란다.
“조금 느릴 뿐”과 “지연의 신호”를 가르는 기준: 월령별 체크와 부모가 오늘 할 수 있는 첫 행동
언어발달은 아이마다 속도가 다르다. 하지만 ‘다름’과 ‘지연’은 구분해야 한다. 기준은 생각보다 명확하다. 대략 9~10개월에 옹알이가 자음·모음이 섞여 다양해지고, 12개월 무렵 손가락으로 가리켜 요구하거나 관심을 공유하며(공동주의), 의미 있는 단어(“맘마”, “빠빠”)가 1~2개 나온다. 15개월엔 3~5개, 18개월엔 10~50개 단어로 늘며, 24개월엔 두 단어 연결(“물 더”, “엄마 가”)이 자연스럽고, 낯선 사람이 알아듣는 발음 비율은 ‘4의 법칙(1세 25%, 2세 50%, 3세 75%, 4세 100%에 근접)’으로 오른다. 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면 지연 가능성을 의심한다. 특히 ① 9~10개월에 자음 옹알이가 거의 없음, ② 12~15개월에 가리키기·손 흔들기·까꿍 같은 사회적 제스처가 드묾, ③ 16개월에 의미 단어가 없음, ④ 24개월에 자발적 두 단어 조합이 없음, 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거의 없음, ⑥ 이미 하던 말·제스처가 줄거나 사라짐(퇴행), ⑦ 장난감 ‘기능놀이(예: 자동차 굴리기)’보다 반복적 줄 세우기·회전만 집착, ⑧ 과한 침 흘림·씹기 어려움·발음이 매우 부정확, ⑨ 눈맞춤·함께 보기·따라하기가 지속적으로 약함—이런 패턴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다. 부모가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첫 행동은 세 가지다. 첫째, 일주일 언어노출 일지를 쓴다(대화 시간, 책 읽기, 화면 시간, 밖에서의 경험). 둘째, ‘말 시키기’ 대신 ‘말하게 만드는 환경’으로 바꾼다—눈높이에서 멈추고 기다리기(5~10초), 아이가 낸 소리·제스처를 말로 확장(“바!”→“바나나 먹고 싶구나”), 선택지 두 개 제시(“물? 우유?”), 공동주의 놀이(같은 사물 바라보며 번갈아 말하기). 셋째, 선별 검사를 예약한다—소아과에서 성장·발달·청력 확인과 필요 시 언어·행동 선별 도구(예: 18·24개월 체크리스트)를 진행하고, 결과에 따라 언어평가·조기중재 센터로 연결한다. 중요한 것은 ‘조기’라는 단어의 의미다. 빨리 시작할수록 단위 시간당 효과가 크고, 부모 코칭만으로도 궤도가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레드 플래그 → 가정 코칭(4주) → 평가·중재 경로: 실행 중심 로드맵
① 레드 플래그 세부 목록: A) 이해·반응 영역—12개월 이후 이름 부르면 일관되게 돌아보지 않음, 18개월 이후 몸짓 없이 1단계 지시(“공 주세요”)를 잘 못 따름, 소리에 과도하게 둔감·예민. B) 표현·말소리—16개월 단어 없음, 24개월 두 단어 조합 없음, 36개월에도 문장이 3단어 미만, 4세에도 낯선 사람이 절반 이상 못 알아들음, 특정 자음만 고집·모음만 반복. C) 사회성·놀이—가리키기·보여주기 적고 상호작용보다 혼자 반복 놀이, 흉내내기·역할놀이가 거의 없음. D) 퇴행—몇 달 전 하던 단어·제스처가 감소. E) 구강·운동—침 과다, 씹기 어려움, 안면·구강 근긴장 문제 의심. 하나라도 해당하면 다음 단계로 간다. ② 가정 코칭 4주 로드맵: 1주차—‘환경 소거’와 ‘기다림’. TV·배경음 끄기, 책상·바닥에 탐색 가능한 장난감 5개 이하만 두기, 아침·저녁 10분씩 눈맞춤 놀이(자동차 밀고 받기, 공 굴리기, 숨바꼭질)로 공동주의를 열고, 아이가 주도하면 보호자가 ‘한 단어 더’ 확장(“멍멍!”→“갈색 멍멍! 와!”). 2주차—‘모델링·확장·재진술’. 아이 말 뒤에 1~2단어를 덧붙여 되돌려주기(확장), 잘못된 형태는 자연스럽게 고쳐 말해주기(재진술), 단어 대신 제스처가 나오면 말+제스처로 동시 모델링. 사물·그림책은 ‘이름→기능→속성’ 순서로 확장(“사과→먹는 거→빨간 동그란 사과”). 3주차—‘통제된 좌절(의사소통 유도)’. 요구를 즉시 충족하지 않고 3~5초 멈춤, 투명 용기에 간식·장난감 넣기, 뚜껑을 일부러 꽉 닫아 ‘도와줘’ 표현을 유도, 선택 질문(“파란 블록? 노란 블록?”), 일상 루틴에 반복 구절을 넣어 예측 가능성 상승(“문 열어요—딸깍!”). 4주차—‘상징놀이·역할놀이’ 확장. 인형에게 먹이기·재우기, 병원놀이, 장난감 음식 주문과 배달 놀이처럼 역할 대화가 필요한 놀이를 설정하고, 보호자는 서술자처럼 짧게 말로 프레이밍(“곰돌이가 배고프대. 뭐 먹을까?”). 매일 30개 이상의 ‘말할 기회’를 만들고(요구·선택·설명·감탄), 화면은 총 30분 내, 반드시 공동 시청·대화 동반으로 제한한다. ③ 평가·중재 경로: 첫 관문은 청력이다—반응이 모호하거나 중이염 병력이 잦다면 청력선별(OAE 등)과 필요 시 정밀검사를 진행한다. 동시에 발달 선별(연령별 체크리스트)로 언어 단독 지연인지, 전반 발달 지연/사회성 발달 이슈(예: 공동주의·가리키기 부족) 동반인지 가늠한다. 언어평가는 수용어(이해)·표현어(말하기)·말소리(조음)·구문(문장)·실용 언어(사회적 사용)를 나눠 시행하고, 결과에 따라 1) 부모 코칭 중심 모니터링, 2) 단기 치료(주 1~2회)와 가정 프로그램 병행, 3) 사회성·행동 중재 동반(또래 상호작용, 시선 맞추기, 턴테이킹 훈련)으로 나눈다. ④ 흔한 오해 반박: 이중언어가 지연을 만든다?—아니다. 집에서는 편한 언어로 풍부하게 말하고, 단지 ‘일관성과 양’을 확보하면 된다. “남자아이는 원래 늦다”—성별 차이는 크지 않다. “TV 동요가 말을 늘린다”—수동 노출은 효과가 약하고, 오히려 상호작용 시간을 빼앗는다. ⑤ 일상 설계 팁: 냉장고·문·불·물·간식·옷·신발 등 ‘반드시 말해야 얻는’ 순간을 루틴화, 집안 곳곳에 그림카드(물·과일·화장실·밖에 나가요)를 붙여 상징과 단어를 연결, ‘하루 10권’이 아니라 ‘한 권을 10번’ 방식으로 같은 문장 패턴 반복. ⑥ 목표 세우기: 4주 SMART 목표 예—“아이는 하루 30회 이상 말할 기회를 얻고, 보호자는 그중 절반에서 확장·재진술을 적용한다.”, “아이는 2주 내 동물 3가지를 이름짓고, 4주 내 두 단어 조합 5가지를 자발적으로 사용한다.” ⑦ 언제 바로 진료?—언어 퇴행, 전혀 반응 없음, 씹기·삼키기 어려움·코로 음식 역류, 얼굴·혀 근긴장 이상, 발달의 여러 영역 동반 지연, 심한 행동 문제(자해·타해)가 보이면 지체 없이 소아과·전문센터 평가가 우선이다.
기다림이 아니라 설계: ‘기회→상호작용→확장’의 반복이 언어를 키운다
언어는 갑자기 ‘트이는 순간’의 기적보다, 하루 수십 번의 작고 확실한 상호작용이 쌓여 생긴다. 그래서 전략은 단순하다. 첫째, 기회를 만든다—아이 스스로 표현해야 얻을 수 있는 순간을 디자인하고, 멈춰 기다린다. 둘째, 상호작용한다—눈맞춤과 공동주의를 최우선에 두고, 아이가 낸 어느 작은 신호에도 반응한다. 셋째, 확장한다—아이의 한 단어에 한두 단어를 덧붙여 되돌려주고, 잘못된 말은 자연스럽게 바르게 들려준다. 넷째, 기록한다—하루 말할 기회 수, 자발 단어·두 단어 조합, 책 읽기 시간, 화면 시간을 체크해 일주일에 한 번 흐름을 본다. 다섯째, 연결한다—의심이 들면 ‘청력→발달 선별→언어평가’의 루트를 밟고, 필요 시 조기중재로 이어간다. 부모가 할 수 있는 변화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TV를 끄고, 아이 눈높이에서 멈추고, 한 문장을 더 붙여 말하고, 같은 놀이·같은 책을 반복하는 일은 오늘 저녁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만약 레드 플래그가 보인다면 주저하지 말자. 빠른 선별과 작은 환경 변화만으로도 4주 안에 ‘반응이 늘었다’, ‘두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체감하는 집이 많다. 언어는 아이의 사고·감정·사회성을 여는 열쇠다. 그 열쇠를 기다림의 의자에 두지 말고, 우리의 손 안에서 돌려 보자. 기회와 상호작용, 그리고 확장을 매일 반복하면, 말은 반드시 따라온다.